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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과 정미의병

을미의병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유생들의 친일내각을 상대로 한 항일의병이다. 전국 의병 봉기를 틈탄 아관파천으로 친러내각이 정권장악했다. 단발령 철폐와 공세 탕감으로 의병들은 해산했다. 정미의병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고종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이 계기가 되었다. 유생 중심의 이전 의병과는 다르게 농민, 천민도 동참했다. 1909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해산되었다.

한국사 2013.06.18

대한자강회

대한자강회 1906년 설립되었다. 민중계몽단체이며 이준의 헌정연구회가 전신이다. 장지연, 윤효정 등이 설립자이다. 대한자강회 월보 발행하고, 연설회 개최했다. 의무교육 실시, 사범학교 설립, 조혼금지, 유색 복장 착용, 단발시행, 황무지 개척, 일제의 황무지개척의 저의, 임업의 필요성, 토지개발, 종자개량, 등을 정부에 건의 했다. 이완용의 지시로 1907년 해산되었다.

한국사 2013.06.18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갑오개혁(=갑오경장) 1894년부터 1896년까지 19개월동안 3차에 걸친 개혁을 지칭한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한 3차 개혁은 을미개혁이라 한다. 김홍집 내각이 개혁을 추진했다. 개혁의 내용은 군국기무처 설치, 탁지아문 설치, 국왕 권한 축소, 은본위제도로 조세 금납화, 도량형을 일본식으로 개편, 문벌폐지, 노비 매매 금지, 연좌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등이 있다. 일본에 의존된 개혁으로 실패했다. 홍범 14조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으로, 갑오개혁이후 선포되었다.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실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은 왕족만이 하고 왕족과 친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3 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외척의 정치관여는 용납하지 않는..

한국사 2013.06.18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농민이 합세하였다. 탐관오리 조병갑의 횡포가 원인이 되었다. 폐정개혁안 제시 > 전주화약 체결(폐정개혁안 실시와 집강소 설치) > 농민군이 집강소 설치(전라도 지역 53개소 지방자치기구) 1894년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폐정개혁안 탐관오리 처벌, 노비문서 불태울것, 백정의 평양립 폐지, 과부의 재혼 허용, 무명의 잡부금 폐지, 관리채용에 인재등록, 일본과 상통하는자 엄벌,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면제, 토지는 균등하게 분작할 것, 등 12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사 2013.06.18

흥선대원군

이름은 이하응, 고종의 아버지이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한직을 지냈다. 어린 고종의 섭정을 하며 집권하였다. 안동김씨를 숙청했다.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했다. 47개소를 제외한 서원을 모두 철폐 후 사대부 반발, 백성 지지를 얻었다. 육전조례, 대전회통 간행했다. 삼정의 개혁(군정(호포제), 전정(은결색출), 환곡(사창제부활)) 비변사를 폐지했다.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 분리했다. 관복과 서민의 의복제도 개량했다. 양반과 상민의 차별없는 세금 징수했다. 사창 설립했다.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 원납전 강제징수했다. 통상수교거부정책(쇄국정책)으로 유생층 지지를 얻었다. 천주교박해 후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신미양요 후 척화비 설립했다. 명성왕후와 반대파 최익현의 탄핵으로 10년만에..

한국사 2013.06.18

임오군란

임오군란 1882년 구식군대가 난을 일으켰다.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를 받고, 봉급 미지급이 원인이였다. 민씨정권이 집권하던 중에 짧게나마 흥선대원군이 재집권 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는 궁녀 옷으로 변장해 탈출했다. > 흥선대원군 재집권했다. > 민씨일파의 청에 군대지원요청을 했다. > 대원군이 청으로 호송되었다. 별기군 교관과 공병소위 및 순사13명을 살해한 대가로 제물포조약을 체결당했다. 결과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었다.

한국사 2013.06.18

독립협회

독립협회 1896년 서재필이 설립했다. 강연회, 토론회로 민중계몽운동을 했다. 모금으로 독립문을 세웠다. 러시아 공사관에 아관파천한 고종을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시켰다. 외국인의 지하개발권, 철도부설권을 중지해 달라고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종로광장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헌의 6조를 결의했다. 1898년 해산했다.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전제황권을 견고히 할 것. 2. 각종 이권의 계약 및 외국과의 차관,조약은 각부대신과 중추원의장이 합동하여 날인한 것이 아니면 시행치말 것. 3. 모든 재정은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예산,결산을 인민에게 공표할 것. 4. 중대범인의 재판은 공개하고 피고가 자복한 뒤에 시행할 것. 5. 칙임관(고급 관리)을 임명할 때에는 황제가 정부에 자문을 받아 다수..

한국사 2013.06.18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개화당)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있다. 일본수신사와 조사시찰단 파견, 청나라에 영선사파견. 한성순보 발행. 통리기무아문(청 모방)설치했다.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변법자강론을 주장했다.(전면개화, 메이지 유신이 모델) 임오군란 이후 민씨정권 붕괴 후 대원군이 재집권하지만 청나라의 군대파견으로 민씨정권의 재집권과 친청보수화정책으로 개화파는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분리되었다. 온건개화파(사대당, 수구당)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조영하 등이 있다. 청나라와 민씨정권과 협력했다. 동도서기론을 주장했다.(유교사상을 유지하며 서양문물 수용, 청의 양무운동이 모델) 위정척사파 이항로, 최익현, 기정진 등이 있다. 개화를 반대, 유교사상 전통 유지를 ..

한국사 2013.06.18

갑신정변

갑신정변 1884년 김옥균을 중심의 급진개화파가 청나라로 부터 자주독립과 근대화를위해 일으킨 정변이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양반출신 청년지식인이 중심이 되었다. 창덕궁에서 청군에게 패배, 개화당의 3일천하로 끝났다. 민중지지결여, 위로부터의 개혁, 일본군에 의존하여 실폐했다. 갑신일록 14개조, 대원군 복귀, 청에 대한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 문벌 폐지. 지조법 개혁, 내시부 폐지, 탐관오리 처벌, 환상제도 폐지, 규장각 폐지, 순사제도 실시로 도적방지, 혜상공국(부보상 보호 기관) 폐지, 유배자 석방, 근위대 설치, 모든 국가제정은 호조가 관할, 대신과 참찬이 정사를 집행, 육조외 관청 폐지.

한국사 201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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